도시의 뒤편,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고물상은 존재합니다. 더 이상 쓰이지 않는 물건들이 모이는 곳이자, 누군가의 기억과 시대의 흔적이 쌓이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 고물더미 속에는 단순한 ‘폐기물’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15년 차 고물상 운영자의 관찰일지를 토대로, 대한민국에서 어떤 물건이, 누구에 의해, 어떤 이유로 버려지는지를 파헤쳐봅니다. 쓰레기의 배후엔, 늘 누군가의 삶이 있습니다.
고물상의 시작과 한국 자원순환 산업의 흐름
고물상은 공식적으로는 ‘폐기물 중간처리업’ 또는 ‘고철 및 비철 금속 매입업’으로 분류됩니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 도시화와 함께 본격적으로 등장했으며, 1980~90년대 산업 폐기물 증가와 함께 급속히 성장했습니다.
2023년 기준, 국내 등록된 고물상은 약 1만2천여 개로 추정되며, 대부분 가족 단위 운영이 많고, 전국 읍면동 단위마다 2~3곳 이상이 존재합니다. 법적으로는 사업자 등록과 폐기물관리법에 따라 영업이 가능하지만, 비공식 고물상도 여전히 다수 존재합니다.
고물상은 단순히 재활용품을 모으는 공간이 아니라, 국가 자원순환체계의 ‘비공식 허브’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누가 무엇을 버리는가? 주체별 폐기물 특성
고물상 운영자는 하루 평균 수십 건의 수거 요청과 자율 반입을 처리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버려지는 물건이 개인의 직업, 경제력, 주거환경에 따라 확연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1인가구 20~30대:
주로 소형가전, 의류, 조립형 가구가 많으며, 시즌 이사철(2~3월, 8~9월)에 집중됩니다. 대개 사용감이 적고, 상품성 있는 물건도 많습니다.
고령층 60대 이상:
세월이 묻은 재봉틀, 라디오, 금속식기류 등 장기 보유 물품이 주를 이룹니다. 자녀 세대가 정리 차원에서 대량 반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영업자/폐업 점포:
간판, 업소용 냉장고, 금속 테이블 등 상업용 비철 폐기물이 다수를 차지합니다. 구조조정이나 경기불황기에 급증합니다.
버려진 물건 속 이야기: 기억과 흔적의 기록
고물상은 단순 폐기물 처리장이 아닌, 사회적·정서적 유물 보관소와도 같습니다. 운영자들은 종종 가방 속 편지, 다이어리, 졸업앨범, 장난감 등 개인의 기억이 담긴 물건을 마주하게 됩니다.
어느 날, 운영자 A씨는 낡은 가방에서 ‘1988년 서울올림픽 기념 티켓’과 고등학교 시절 연애편지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이건 단순한 쓰레기가 아니라 한 시대의 조각”이라며 일부 물건은 별도로 모아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물건은 최근 ‘업사이클링 예술’ 또는 ‘기억의 아카이브’라는 흐름으로 이어지며, 문화예술계에서 활용되기도 합니다.
고물상 경제 생태계: 수거부터 도매까지
고물상은 물건을 직접 수거하거나 주민이 반입한 물건을 단가별로 매입한 뒤, 이를 대형 도매상 또는 제철소, 재가공업체에 판매합니다. 주요 품목은 철, 알루미늄, 구리, 종이, 플라스틱, 가전 등입니다.
예를 들어, 철의 경우 2025년 기준 kg당 200~250원, 알루미늄은 1,200원, 폐지는 100~150원선에서 거래됩니다. 그러나 유가 금속 외엔 대부분 단가가 낮고, 분리수거 및 보관 공간, 화재 안전 등 운영 부담이 큽니다.
고물상 운영의 현실: 고된 육체노동과 사회적 편견
고물상은 자율적 자영업이지만, 하루 종일 무거운 물건을 분류하고, 악취와 분진을 견디며 일해야 하는 고강도 노동입니다. 대부분 50대 이상 중장년층이 운영하며, 여성 운영자도 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환경 미화와 거리감 있는 직업’이라는 편견이 여전합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고물상이 도시 미관 저해 요소로 간주되며, 주거지 인근 설립을 제한받기도 합니다.
또한 최근엔 무단투기, 불법 고철 거래 등으로 인해 이미지가 왜곡되는 경우도 있어, 현업 종사자들의 자정 노력과 제도적 정비가 동시에 요구됩니다.
정책과 제도의 사각지대: 고물상의 공공적 기능
고물상은 분명 상업적 목적의 사업장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지자체의 재활용 부담을 줄이고, 자원 재순환에 기여하는 ‘공공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련 지원 제도는 미흡합니다.
예를 들어, 소상공인 정책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폐기물 처리 기준 강화에 따른 부담만 늘어난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2024년 국회에서는 ‘자원순환 중개업체 등록제’가 논의되었지만, 고물상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습니다.
향후에는 ‘비공식 자원순환 주체’에 대한 제도적 포용과, 청년 인력의 진입을 돕는 안전·장비 지원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결론: 누군가의 쓰레기는 또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다
고물상은 단순히 물건을 버리는 공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보지 않는 물건들이 모여, 새로운 순환을 기다리는 장소이며, 때로는 한 사람의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매일 많은 것을 버립니다. 그러나 그 버림 속에 어떤 흔적이 있었는지를 들여다보는 순간, 고물상은 더 이상 단순한 업장이 아닌, 도시의 기억창고가 됩니다.